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신성공소, 정읍지역 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다니다 보면 순교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성지도 만나지만,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을 이어갔던 교우촌과 공소도 만나게 됩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 자리한 신성공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금은 조용한 산골의 작은 한옥 공소처럼 보이지만, 한때 이곳은 정읍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순례는 아름다운 한옥 공소를 둘러보는 것보다 이 깊은 곳에서 어떻게 신앙이 뿌리내리고 이어져 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산길 끝에서 만난 신성공소
‘천주교 신성공소 100m’라는 안내판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자 오래된 돌담과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성당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높은 종탑이나 서양식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어요. 돌담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모습은 오래된 한옥마을의 어느 집을 찾아온 것처럼 편안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성공소가 정읍지역 천주교에서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신자들이 정읍의 산간지역으로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고, 신성공소는 1893년 설정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03년 6월에는 수류본당 남쪽 지역을 분리해 신성리본당이 설립되었으며,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습니다.
현재 전주교구에서도 신성공소를 ‘정읍지역 사목 중심지’였던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드린 짧은 기도
솟을대문을 지나 공소 안으로 들어가니 제가 방문했을 당시 한쪽 건물에서는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당 가운데에서는 성모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성모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다 보면 많은 것을 보고 사진에 담게 되지만, 이렇게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순례지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도를 마치고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자 사진으로 보았던 신성공소의 한옥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성당이 아닌 옛 사제관에 남은 신앙
기와지붕과 나무 기둥, 흰 벽 그리고 앞쪽의 작은 종탑까지. 한국 전통 건축과 천주교 신앙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보면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만나는 신성공소 건물은 당시의 성당 건물이 아니라 옛 사제관입니다.
제2대 주임 미알롱 신부는 1909년 봄부터 성당 건축을 시작해 8칸 규모의 기와집 성당과 4칸 사제관, 6칸 회합실 등을 지었고 1914년 완공했습니다. 이후 1931년 본당이 정읍 읍내로 이전하면서 신성리본당의 성당 건물은 매각되었고, 현재는 당시 사제관으로 사용했던 한옥 건물이 공소로 남아 있습니다.
공소와 함께 옛 성당 터의 주춧돌과 회합실, 식료품을 보관했던 지하창고 등도 남아 있어 당시 공동체의 생활을 짐작하게 합니다.
제대 앞에서 만난 선조들의 신앙생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깥의 한옥 모습처럼 내부에서도 굵은 나무 기둥과 들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 아래로 장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앞쪽에는 십자고상과 제대가 자리하고 있었어요. 크고 화려한 성당의 제대와는 다른 소박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천천히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제대 주변에 있던 오래된 그림과 자료들이었습니다. 혼인성사, 병자성사, 고해성사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옛 교리 자료도 볼 수 있었고, 성모자 그림과 오래된 사진, 문서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책이나 스마트폰으로 쉽게 교리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절 신자들은 이런 그림과 자료를 보면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제대의 이런 모습이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오면서 우리 선조들의 신앙생활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담쟁이 돌담을 지나며
성전에서 나와 마당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옆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오래된 돌담을 푸르게 감싸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눈에 들어왔어요.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돌담과 그 위를 덮은 푸른 담쟁이가 한옥 공소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신성공소는 화려하게 꾸며진 순례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래된 돌담과 한옥, 작은 마당과 주변의 산세가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에서 살아갔던 신앙 공동체의 시간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킨다는 것
순례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길을 따라 편하게 찾아왔지만, 박해를 피해 이곳까지 들어온 신앙 선조들에게 이 산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삶의 터전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야 했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다음 세대에 그 믿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의 생활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의 마지막에는 한 가지 질문이 오래 남았습니다.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는 내 신앙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정읍 신성공소는 오래된 한옥 건축물을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순례지가 아니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속에 정착했던 교우촌에서 시작해 정읍지역 신앙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신성공소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서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함께 돌아볼 수 있었던 조용하지만 깊은 순례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읍 신성공소 순례 정보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성길 176-17
소속: 천주교 전주교구 시기동성당 관할
문의: 시기동성당 063-538-0091
신성리본당 설립: 1903년 6월
현재 건물: 1909년 건축을 시작한 옛 한옥 사제관을 공소로 사용
문화유산: 2002년 문화재자료 제180호 지정
미사 및 방문 가능 여부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순례 전 전주교구 또는 시기동성당의 최신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하면서 화려한 성지보다 작은 공소에서 더 오래 머물렀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에게 기억에 남아 있는 공소 이야기도 함께 나누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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